2008/09/11 09:00

일렉트로니카 - 인문주의와 디지탈을 생각하다.


 어쩌면 종교적인 세상의 인간이 훨씬 행복하다. 아는 것이 병이란 말이 있듯이, 믿는 마음에 어떤 전제조건을 달지 않고 믿음 그 자체로 평온을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는 풀뿌리와 동물 가죽 따위로 주문를 노래하는 아프리카 부족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아주 머나먼 과거 이야기이다. 도심 교회당에 모여 노래책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는 그들을 이 범주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종교적이지 않다.

 그보다 조금 덜 먼 과거에 인문주의자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이후부터는 알지 않고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비교양이란 말로 치부되기 시작한다. 음악에 인문주의 잣대를 적용하려는 가장 큰 시도는 바로 오선지였다. 자연상태로 존재하는 사운드를 다섯줄 네칸 오선지 안에 가두어 넣음으로써 자연의 한켠을 정복하려 시도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들은 오선지를 활용한 기교파들의 향연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시작해서 현재의 록밴드까지 아날로그 인문주의 사운드는 500년 역사를 유유히 흘러오고 있다.

 일렉트로니카 쟝르는 디지탈 기술이 이루어낸 오선지로부터 해방의 결과물이다. 해방과 함께 다가오는 음악들은 너무나 디지털적이다. 기술이 정감을 앞서가고, 사운드 엔지니어가 프로듀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샘플링과 리메이크가 일반화되고, 데모 버전은 쉽게 완성된다. 여기서 더이상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정서를 잃은 사람들의 유흥 도구로 전락한다.

종교주의자들은 mystery를 추구한다. 신비는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외경이다.
인문주의자들는 romance를 추구한다. 낭만은 아는 만큼 꿀 수 있는 꿈과 같은 것이다.
디지털리스트는 scalability를 추구한다.
이를테면, 어젯밤 꾸었던 꿈을 오늘낮에 이루어내는 현실로의 확장이다.

 
P.S
요즘 감성적 일렉트로니카를 추구한다는 시부야케이 음악을 주워 듣고 있다.

Looks like Chloe - Havard


HOME feat. COLDFEET - Daish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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